<디지털애셋>이 가상자산법 입법을 위해 심층 기획을 시작합니다.
2021년 5월 첫번째 가상자산법 제정안 발의 이후 2년 가까이 지났습니다. 국회엔 최근까지 18건의 제정안과 관련법 개정안이 제출됐습니다.
그러나 법안 심의는 3월 28일에야 처음 이뤄졌습니다. 권도형 테라폼랩스(TFL) 대표가 3월 23일(현지시각) 몬테네그로에서 체포된 것이 계기가 됐습니다.
그동안 몇 차례 입법 기회가 있었지만 모두 놓쳤습니다. 입법 실패는 사건·사고를 낳고 있습니다.
서울 강남 한복판에서 벌어진 '청부 납치·살해' 사건은 김치코인 PURE(퓨리에버)의 시세조종을 처벌할 수 있었다면 벌어지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5개 가상자산 원화 거래소 가운데 2위 빗썸과 3위 코인원의 임직원이 '상장 뒷돈' 혐의로 재판이나 검찰 수사를 받고 있습니다.
<디지털애셋>은 무엇보다 가상자산 이용자 보호와 불공정거래 규제를 위해 가상자산법 입법이 이뤄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를 위해 2021년 이후 국회와 정부, 시장이 입법을 둘러싸고 어떻게 움직이고 노력했는지 기록하고 정리하고자 합니다.
“법이 있었다면 ‘테라 사태’ 막지 않았을까요?”
“가상자산법은 언제 만들어지나요?”
권도형 테라폼랩스(TFL) 대표가 3월 23일(현지시각) 몬테네그로에서 여권 위조 등 혐의로 체포됐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국회와 금융 당국, 가상자산 거래소들에 이런 문의가 이어졌다고 한다.
권 대표가 해외 도피 11개월만에 갑자기 체포되자 다시 사태의 심각성과 가상자산 법률의 필요성, 그리고 그런 법이 여전히 없다는 사실을 새삼 떠올리게 된 것이다.
국회 정무위원회는 3월 28일 법안소위에서 18건의 가상자산 관련 제정안과 개정안을 처음으로 심의했다. 권 대표 체포 닷새 만이다.
한 가상자산 규제 전문 변호사는 “권 대표 체포 덕분에 거의 2년 만에 국회가 가상자산법에 관심을 갖게 됐지만 언제 또 관심이 사라질지 모른다”고 말했다.
2021년 5월 민주 이용우 제정안 최초 발의
가상자산 관련 법안은 2021년 5월 이용우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가상자산업법안’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발의했다. 제정안이었다.
이 법안은 가상자산의 정의와 사업의 범위, 가상자산사업자에 대한 진입규제 및 이용자 보호, 불공정거래행위 금지, 가상자산업 관계 단체의 설립 등을 규정했다.
2023년 3월 김한규 민주당 의원의 ‘암호자산 이용자 보호에 관한 법률안(제정안)’이 마지막인데 이것까지 모두 18개의 제정안과 관련법 개정안이 발의됐다.
이용우 의원이 처음 제정안을 발의했을 때 가상시장에 대한 사회의 관심은 뜨거웠다. 자고 나면 가격이 올랐고 시장도 엄청나게 커졌기 때문이다.
2021년 5월 국내 4대 가상자산 거래소 거래 금액은 약 12조5700억원(4월30일 기준)을 기록했다. 당시 코스피 시장 거래대금(19조2080억원)의 65%에 육박했고 코스닥 시장(9조5300억원)을 웃돌았다.
1년 전 주요 거래소 일 평균 거래액 7600억원에 비하면 거짓말 같이 규모가 늘어난 것이다. 비트코인 가격은 2021년 11월 개당 약 8200만원까지 올라 사상 최고가를 기록했다.
2021년 11월 비트코인 사상 최고가, 입법은 실패
그러나 입법은 이뤄지지 않았다.
2021년 11월 23일 정무위는 법안심사1소위원회(소위)를 열고 도규상 당시 금융위원회 부위원장에게 “한 달 뒤 통합안을 만들어 국회에 보고하면 그 때부터 다시 법안을 검토하자”고 주문했다.
소위 위원들은 도 부위원장에게 “자본시장연구원이나 금융위 산하 연구기관에 연구 용역을 맡겨 가상자산법안과 관련법 개정안 등 현재 발의된 13개 법안을 통합해서 한 달 뒤 다시 보고해 달라”고 했다.
그러나 금융위의 통합안 보고 시한은 12월 9일 마지막 본회의 이후였다. 2021년 국회의 가상자산법 제정은 그렇게 실패했다.
당시엔 당국도 입법엔 적극적이지 않았다.
2021년 가을 국정감사 당시 고승덕 전 금융위원장은 가상자산법 입법에 대해 “국회 뜻에 적극 따르겠다”고 거듭 밝혔다.
그러나 당국이 적극 나서서 의원들을 설득하진 않았다. 당시 금융위 태도는 매우 보수적이었던 것으로 전문가들과 업계는 기억한다.
이후 가상자산법 입법은 정치권 관심에서 멀어졌다. 2022년 3월 대통령 선거가 모든 쟁점을 삼켰다.
대선 이후 가상자산은 의미 있는 국정과제도 아니었다. 대선 후보들 모두 2022년 1월 가상자산 공약을 발표했지만 대선 이후 가상자산법 입법에 영향을 주진 못했다.
UST(테라USD)·LUNA(테라) 가격 폭락 사태
첫번째 제정안 발의 이후 1년만에 정부와 국회가 가상자산 때문에 크게 비판 받는 일이 벌어졌다. 가상자산 시장에 큰 사고가 터졌기 때문이다.
2022년 5월 UST, LUNA 가격폭락 사태로 시장에선 약 50조원이 사라졌고 피해자는 국내에만 28만명에 이른다는 보고가 있었다. 이 사태로 목숨을 끊은 사람도 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정치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야는 대책과 예방책 마련에 모처럼 집중했다. 여당은 여러 차례 당정 간담회를 열어 다양한 논의를 이끌었다. 야당도 특위를 만들어 대책을 논의했다.
이 과정에서 2022년 6월 디지털자산거래소 공동협의체 닥사(DAXA〮Digital Asset eXchange Alliance)가 탄생했다. 여당이 당정 간담회에서 업계 자정을 위한 자율규제기구(SRO) 구성을 압박한 결과였다.
닥사는 이후 시장감시, 상장 및 상장폐지 기준, 준법 등을 위해 한국에서 유일한 자율규제기구로서 거래소들과의 빈틈 없는 소통을 중심으로 실질적인 성과를 쌓아오고 있다.
테라 사태, FTX 파산
서울남부지검 증권금융범죄합동수사단이 4년만에 부활해 첫 사건으로 테라 사태 고소 고발 사건 수사에 착수해 1년 가까운 수사를 벌여 왔다.
가상자산 규제 전문가들은 “정부와 국회가 가상자산법 입법에 서둘렀다면 테라 사태를 막을 수 있었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2022년 11월에 바하마에 본사를 둔 FTX가 법정관리를 신청하는 일이 벌어졌다. FTX는 바이낸스 다음으로 큰 가상자산 거래소이고 선물 등 파생상품 전문 거래소로 유명했다.
그러나 자기 발행 코인(FTT)을 자산으로 지나치게 많이 보유하고 있어 재무 안전성이 취약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가상자산 뱅크런(대규모인출 사태)이 발생했고 8일만에 문을 닫았다.
FTX는 말하자면 세계 어느 나라 정부의 규제도 받지 않는 위험한 거래소였다. 미국 연방 검찰의 수사가 시작되면서 고객 자금 유용, 횡령, 사기 등 다양한 위법, 탈법 사실이 드러났다. FTX 파산으로 한국 피해자가 가장 많았다는 소문도 돌고 있다.
"금융위 이번에는 입법 주도"
금융위가 입법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테라 사태와 FTX 사태가 유력한 규제 환경을 만든 셈이다.
금융위는 2022년 8월 디지털자산 민관합동TF를 만들어서 가상자산법 입법을 위해 민간 전문가들의 의견과 경험을 모아 효과적이고 시의적절한 입법 방향을 잡았다.
2022년 10월부터 금융위 가상자산 실무 책임자들이 정무위 여야 위원들에게 적극적으로 입법 필요성을 설명하고 호소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 결과 여야 공히 유사한 법안을 다시 발의했다.
여당 윤창현 의원이 2022년 10월 31일 ‘디지털자산 시장의 공정성 회복과 안심거래 환경 조성을 위한 법률안’을 발의했다.
야당 백혜련 정무위원장도 11월 10일 ‘가상자산 불공정거래 규제 등에 관한 법률안’을 발의했다.
금융위가 민간 전문가들과 함께 가상자산 시장에서 가장 시급한 문제를 효율적으로 우선 규제하자는 방향을 잡은 뒤 입법의 큰 그림을 단계적으로 설정했기 때문에 나온 법안들이다.
금융위는 불공정거래 규제와 이용자 보호에 집중한 ‘미니 입법’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2021년 5월 첫번째 제정안 이후 정무위는 기본법 제정에 무게를 둬 왔다. 금융위는 그러나 기본법을 고집하면 입법이 계속 미뤄질 거라고 판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갑래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2022년 12월 14일 국회 기획토론회 ‘혼돈의 가상자산시장, 어떻게 해야 하나’에서 “현재 발의된 대부분의 가상자산 법안들이 모두 불공정거래 문제 해결과 이용자 보호를 공통 중점 사안으로 두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산업 육성도 중요하지만 주요 사안들 위주의 단계적 입법을 목표로 삼고 일종의 ‘미니 입법’에 먼저 성공했을 때 효과가 상당히 클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금융위 민관합동TF 위원이다.
가상자산 시장엔 ‘겨울’이 왔다. 비트코인 가격은 2021년 11월 최고가(약 8200만원)를 기록한 이후 1년만(2022년 11월)에 2000만원대까지 떨어졌다. 전문가들은 “시장의 침체는 입법엔 호기”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국회 정무위는 몇 개월 째 법안 심의를 못하고 있었다. 여야 정쟁도 거셌고 가상자산은 입법의 우선 순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청부 납치·살해, 빗썸·코인원 상장비리 수사
3월 말 서울 강남 한복판에서 엽기적인 청부 납치·살해 사건이 벌어졌고 PURE라는 김치코인 시세조종이 유력한 범행동기라는 수사 결과가 나왔다.
이 코인은 2020년 11월 코인원이 단독 상장한 김치코인이다. 김치코인은 국내 발행 코인으로 비교적 유통량이 적어 시세조종, 사기 등에 악용되는 코인을 말한다.
그러나 아직 코인 시세조종은 처벌할 수 있는 법이 없다. 이 사실 또한 이용자 보호와 불공정거래 규제를 위한 가상자산법 미니 입법이 조속히 이뤄져야 한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만들었다.
서울남부지검의 상장뒷돈 수사는 비교적 높은 인지도를 가진 거래소들조차 불법과 탈법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3월 중순 검찰은 빗썸홀딩스(빗썸의 지주회사)와 이 회사 이상준 대표를 수십억원의 상장 뒷돈을 받은 혐의(배임증재)로 압수수색했고 최근엔 이 대표를 피의자 신분으로 여러 차례 조사하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검찰 상장비리 수사에서 이 대표와 같은 고위 임원이 수사를 받는 것은 처음이다.
3위 거래소 코인원은 1월부터 검찰의 상장비리 수사를 받았고 전직 임직원 2명과 상장브로커 2명이 이미 형사처벌을 받았다.
적어도 30개가 넘는 김치코인이 상장비리의 대상이 됐고 뒷돈만 29억원이 오간 사실도 수사로 확인됐다.
한 거래소 관계자는 "수사 받는 거래소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가상자산 업계 전체의 문제"라고 말했다.
4월 25일 정무위 법안소위서 통합안 두번째 심의
그러나 3월 23일 몬테네그로에서 권도형 대표가 체포됐고 검찰 수사는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다.
언론과 전문가들은 테라 사태의 피해를 떠올리며 다시 정부와 국회를 주목했다. 한 가상자산 규제 전문 변호사는 “테라 사태 이후 1년 동안 정부와 국회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이나 다름 없다”고 비판했다.
3월 28일 권 대표 체포 이후 닷새 만에 국회 정무위 1소위가 모두 11건의 가상자산법 제정안과 7건의 관련법 개정안까지 18건의 법안을 처음으로 심의했다.
정무위는 이날 18건의 법안을 통합해 ‘가상자산 이용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이라는 통합안을 만들어 심의했다.
한 전직 정무위 관계자는 “1소위가 한 차례 법안을 심의했지만 모두 4차례 정도 심의가 이뤄져야 위원들이 법안에 대해 풍부한 이해를 갖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통합안 두번째 심의는 4월 25일 정무위 1소위에서 이뤄질 예정이다.